작성일 : 16-05-15 08:47
글쓴이 :
최준민
 조회 : 1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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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강릉 최씨(江陵 崔氏)
강원도 강릉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강릉 최씨는 시조를 최흔봉(崔欣奉), 최필달(崔必達), 최문한(崔文漢)으로 달리 하는 세 계통이 있다.
◎관향 -강원도 강릉시
◎시조 -최흔봉, 최필달, 최문한
◎주요 중시조 -최입지, 최치운
◎주요 집성촌 -강원도 강릉시 -강원도 삼척시 -강원도 동해시 -강원도 태백시 -강원도 속초시 -강원도 고성군
강원도 춘천시 -함경북도 명천군 -함경남도 문천군 -평안북도 의주군 -황해도 연백군
경상북도 문경시 -경상북도 울진군
◎주요 인물 -최입지, 최치운, 최응현, 최수성, 최준집, 최규하, 최각규, 최돈웅, 최종영, 최연희, 최지성, 최욱철
◎인구(2000년) -140,854명 (51위)
●시조
강릉 최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통을 달리하는 세 계통이 있다.
전주계(全州系) (최흔봉계, 대경공계)- 고려 태조의 부마 완원위(完原偉) 대경공(大卿公)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한다.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고려 개국시 수많은 전투에서 전승의 공을 세워 삼한통합익찬개국공신에
책훈되었다. 후에 최흔봉의 12세손인 최입지가 강릉군에 봉해지고 후에 그는 강릉의 모산으로 은거해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경주계(慶州系) (최필달계)- 경흥군(慶興君)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한다.
최필달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에 책훈되었고 삼중대광영첨의좌정승에 올랐다.
경흥(후에 강릉)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강화계(江華系) (최문한계)-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한다.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로 삼중대광판군기시사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최입지처럼 그도 강릉의 산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 이후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본관 연혁
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리었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
●역사 인물
강릉최씨는 세 계통을 다 합하여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31명, 무과급제자 46명을 배출하였다.
강릉 최씨의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자점,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세건,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최응천 등이 있다. 대경공 최흔봉의 가문에서 후손으로 유명한 인물은 최입지가 있다.
강릉부원군 최입지는 충렬왕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다가 사직을 하고 강릉의 산속에 은거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세종 때 사망한 그는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충무공 최필달의 가문에서는 최한주가 고려 충렬왕때 대중대부로 명주군에 봉해졌다.
최릉 - 상당부원군. 강릉최씨 시조 삼한통합익찬개국공신 대경공의 11세손이다.
호는 산수제며, 고려 말에 우정승과 상호군을 지내고 평장사를 지냈으며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호장, 벽상삼한중대광영부첨의, 판전리사등을 역임했다. 최릉의 아들이 강릉 최씨의 중시조인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한 후 영의정에 추존된 강릉부원군 충숙공 최입지이다.
최입지 - 강릉군 자는 양필(良弼), 호는 성묵당(誠默堂)이다.
강릉최씨 시조 대경공의 12세손. 상당부원군,평장사 최릉의 아들로 강릉최씨 대경공계의 중시조이다.
1275년(충렬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의 무능한 정치와 부패한 친몽 대신들로 인해 사직을 하고 강릉 모산에서 은거를 하였다.
최입지 사후 충익사공신과 성찬화안사공신에 훈봉되고 검교태보문하시랑과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정승상주국으로
증직되었다. 또한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수태사태상에 증직되었고,조선 세종 때에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그는 강릉최씨 대경공계의 중시조이다.
최유련 - 강릉군.조선개국공신. 최유련은 삼한통합익찬개국공신 완원위 대경공 최흔봉의 1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최입지이고,아버지는 한성부윤과 삼중대신문하좌시랑 평장사를 지낸후 세종때에 영의정으로 가증된
강릉부원군 최안소이다. 문희공 강릉군 최유련은 충목왕때 3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였었다.
공민왕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으며 정헌대부삼찬문화부사,문하시랑평장사,보국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강릉군에 봉해졌다. 1392년(태조 1) 경상도병마도절제사로 있을당시 왜구에게 사로잡혔다가 몰래
도망쳐 나온 명나라 사람 이순 등을 구해 주었다. 후에 참찬문하부사를 역임하였다.
1395년(태조 4)조선개국원종공신에 훈봉되어 공신녹권을 하사받았다. 최유련개국공신록권은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하여 강릉최씨 서울지회 사무실에 보관중이다.
최안소 - 강릉부원군 시조 대경공의 13세손이다.충숙왕 때 경상도존무사(慶尙道存撫使)에 임명되었고,
1347년(충목왕 3)에 통정대부 안동판관(安東判官)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 동중서평장사
예부사 (三重大匡門下侍中同中書平章事禮部事) 에 올라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에
순성보리공신(純性輔理功臣)에 책봉되어 다시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에 봉해졌다.
1361년(공민왕 10) 11월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과 공주가 태후(太后)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할 때 최안소를
양광도순문사(楊廣道巡問使)에 임명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봄에 사직하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이르기를 “최평장사(崔平章事)는 시종일관 청렴한 신하인데, 어찌하여 나를 등지고 은거하려 하는가?” 하며
특별히 허락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최안영 - 예성군 충숙공 입지(立之)의 子. 고려 충숙왕 병인년에 진사과에 오르시고 무진년에 문과에 오르고
한림학사로 부터 성균관제주,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예조, 사조典書에 올랐다.
공민왕 무인년 원나라 홍건적이 침입하였을때이를 격파하여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예성군(芮城君)에 封하셨다,
안동, 순흥부사로 재직시 많은치적을 남기고 청백리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최수 - 대사헌 대경공 최흔봉의 후손. 휘(諱) 수(修). 자(字) 영숙(永叔).
세종 을사년(1425) 6월 고산현감(高山縣監) 정미년 3월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직학 남이영(直學 南李映)과
동방(同榜)으로 뽑히고 집현전 박사에 천거되어 부수찬지제고(副修撰知製誥)로 지평(持平), 계축년에 정언(正言)에
오르고 기사년(1437)에 명(命)을 받들어 원수 최윤덕과 함께 야인(野人) 이만주를 토벌하고 개선하여
모의관(毛衣冠)을 하사(下賜)받다. 이조정랑(吏曹正郞)과 부응교(副應敎)에 오르고 단종(端宗) 임신년에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얼마 후에 예조참의에 옮기고 계유년에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시약(侍藥)에 임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다, 10월에 권력 있는 간신들의 무고로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 절제(節齊)
김종서(金宗瑞) 두 정승이 살해됨을 보고, 공(公)도 정사(政事)를 사퇴하고 삼척 맹방에 은거하여 을해년에
세조께서 왕위에 오르어 대사헌(大司憲)에 기용(起用)하나 나가지 않으고 단종(端宗)이 영월로 가시매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정축년에 상왕께서 승하하시니 공이 눈물 흘리며 유별 (遺別)하며 말씀하기를
「은둔한 사람 명주 최모(溟州 崔某)의 묘(墓)에 도헌(都憲)의 직함(職啣)을 쓰지 말라」이르고, 마침내
울분 하시다 돌아가시다. 엄경제(嚴敬齊)는 경술년(1910)봄에 건립 지어금(至於今). 공(公)의 시(詩)
영호루(映湖樓) 판상운(板上韻)은 현재 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에 현게(懸揭)되어 있다.
최응현 - 충무공 최필달 후손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보직이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훈도를 자원하여갔다.
그 뒤 저작·박사·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가 되어 1년 만에 양
친(養親)하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고성·영월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할 때 선치하였으며, 만기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균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83년(성종 14) 대신의 천거로 집의가 되고
이어 예빈시(禮賓寺)·봉상시(奉常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이어 송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파견되어 명석하게 해결하여 상으로 안마(鞍馬)를 받았다. 1487년 호남의 수적(水賊) 10여인을 잡은 공으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감찰사에 임명되었다.
1489년 대사헌, 1491년 경주부윤, 14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500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1505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다
최이 (1356)- 명원군 (강릉군) 대경공 최흔봉의 15세손,1356(공민왕 5)∼1426(세종 8).강릉군.조선 초의 문신,영의정.
본관은 강릉(江陵). 초명은 원(遠), 자는 유명(惟明).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 유련(有璉)의 아들이다.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 초임된 뒤 1380년(우왕 6) 낭장으로 규정(糾正)을 겸하여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를 지냈다.그뒤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가 되었다가 판도전법총랑 (判圖典法摠郎) 을
지냈고, 1390년(공양왕 2)에 사헌부집의를 거쳐 감문비순위대호군(監門備巡尉大護軍)이 되었다.
그뒤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을 때 삼사좌윤으로 있던 이방원(李芳遠:뒤의 太宗)과 친교를 맺어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다.1392년에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 중추원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394년(태조 3) 중추원부사에 승진하였고, 이듬해 경기좌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397년에 완산부윤(完山府尹)이 되고, 1400년(정종 2)에 대사헌에 올랐으며, 좌군총제를 겸하였다.
1402년(태종 2)에 전라도도절제사가 되었고, 1404년에 참찬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공조판서를 거쳐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1405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왜구가
침범해오자, 형조의 소청 (疏請)으로 상중에도 불구하고 장발(奬拔)되어 충청도병마사 겸 수군도절제사에 보직되어
왜구 소탕에 힘썼다. 1408년에 길주도도안무사(吉州道都安撫使)가 되었고, 이듬해 영진주목사(領晋州牧事)가 되었다.
1412년에 형조판서에 올랐고,이듬해 2월에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그해 6월에 돌아왔다.
1413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평양부윤을 겸하였다가 곧 평안도도순문찰리사(平安道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변방주민들의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소청하였다. 1415년에 의정부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좌군총제부사와 판우군부사가 되어 왕명에 의하여 흥천사(興天寺) 사리전(舍利殿)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418년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다가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하가 공금을 착복한 것을 관리하지 못하였다는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1424년에 재기용되어 판우군도총제가 되었고,명나라 태종이 죽자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세종조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최운경(崔雲慶) : 강릉최씨 시조 삼한통합익찬개국공신 대경공의 22세손. 중종 康寅년 生. 무과급제.
전라수군절도사(정3품) 역임. 중종 정유년에 사마양시 급제한 생원 학계공 숙남 孫. 사직파 파조 첨정공 응서 子.
삼척 토포사,월송 만호 붕동 父. 선조 갑오년 7월 16일 卒 65세. 配 정부인 경주최씨.
최사광 (호판공) : 강릉최씨 시조, 대경공 (최흔봉)의 14세손이며 예성군 (강릉의 옛 지명) 최안영의 아들중 장남.
공민왕 때 과거급제. 한림원 태상박사 성균관 좌상시 개국원종록에 책봉. 판원판서 병마사대호군,대마도정벌참여
개선 후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최한주(崔漢柱) :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13세손이며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
3[(三君 : 경흥군(慶興君) 필달(必達), 명주군(溟州君) 숭언(崇彦), 명주군(溟州君) 한주(崔漢柱)]의 한사람이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몽고(蒙古)가 고려와 함께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종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종3품상 문관품계인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다.
최숭언(崔崇彦) :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시조의 4세손)인 숭언(崇彦)은 고려 때 정1품 문관품계인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며, 정3품 무관벼슬인 풍천 병마사(兵馬使)겸
안집감창사(安集監倉使)를 역임한 강릉김씨(江陵金氏) 춘용(春用)의 딸과 혼인하였다.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 숭언(崇彦)은 시조(始祖) 경흥군(慶興君) 필달(必達)과 13세손 명주군(溟州君)
한주(漢柱)는 최필달계 3군이다.
●현대 인물
최규하 -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최필달계 매창공파)
최문순 - 제36대 강원도지사. (최필달계)
최각규 - 초대 강원도지사, 前 부총리 (최필달계 용연동파)
최연희 - 대한민국 제 15, 16, 17, 18대 국회의원. (대경공계)
최지성 - 삼성전자 부회장, 現 미래전략실장 부회장. (대경공계)
최욱철 - 대한민국 제 15, 16, 17대 국회의원. (대경공계)
최종영 - 前 대한민국 대법원장. (최필달계 용연동파)
최양희 -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대경공계)
최흥집 - 새누리당 당원, 강원랜드 대표. (최필달계 용연동파)
최서면 - 국제한국연구원(원장), 한국몽골친선협회 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 (최필달계 매창공파)
●세거지
전주계-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가구가 살고 있다.
●인구
최씨 본관 중에서는 4번째로 인구가 많다.
1985년 30,940가구 132,300명 -2000년 44,704가구 140,85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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